[티티씨뉴스 충북 괴산= 글·사진 왕보현 기자]
충북 괴산 ‘청인약방’이 주목받고 있다.
63년간 주민 건강 돌본 청인약방 주인 신종철(88)씨가 약방 건물(33.7㎡)과 부지 73㎡와 약방의 비품 일체를 지난 6월 괴산군에 기부했다. 이 소식이 퍼지면서 신문 잡지부터, 신문 방송의 각종 프로그램에 소개되었다.![]() |
▲ 이차영 괴산군수는 “신종철 어르신께서 평생 일궈온 약방을 괴산군에 기부하는 어려운 결정을 해 주셨다. 어르신의 큰 뜻에 따라 괴산군의 자랑인 청인약방을 문화유산으로써 보존해 후세에 물려줄 계획”이라며 “청인약방 인근에는 괴산군 대표 관광지인 산막이옛길, 한국관광공사가 언택트 관광지 100선으로 꼽은 갈은구곡 등 아름다운 관광지들이 있다. 이들 관광자원과 연계한 상품을 개발해 청인약방이 오래도록 기억되도록 노력하겠다”라고 말했다. |
충청북도 괴산군 칠성면 도정리에는 칠성암이라 불리는 7개의 고인돌이 자리하고 있다. 청동기 시대 유적인 고인돌과 함께 족히 200년은 지나 보이는 느티나무 그늘 아래 파란색칠한 함석지붕을 엊은 자그마한 목조건물에 ‘청인약방’이란 간판이 선명하다. 세월의 흔적이 켜켜이 쌓인 약방 유리문에는 붉은색으로 ‘약’이라는 글자가 쓰여있다.
영화 세트장 같은 이 오래된 건물 안에는 지난 1958년 청인약점(淸仁藥店)으로 개점해 ‘청인약포’를 거쳐 ‘청인약방’으로 60여 년을 하루같이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미수(米壽)의 노 약업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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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인약방 내부 지금은 조제약이 아닌 비타민 음료와 일반의약품 일부를 판매하고 있다. 약방 선반에는 신 어르신이 마을에서 활동했을 당시 자료들이 빼곡히 꽂혀 있다. |
산골 마을에서 의사는 물론 약도 구경하기 힘들었던 무의무약(無醫無藥) 시절, 약업사 신종철 선생이 운영했던 청인약방은 마을 유일의 의료기관이었다.
세월이 흐르고 면에 보건소가 생기고 병원과 약국이 들어서면서 청인약방을 역사의 뒷길에서 쇠락을 길을 걸었다. 하지만 평생을 마을의 건강지킴이, 고향 지킴이, 어려운 이웃 돌보며 살아온 5척 단구의 그는 이 마을의 가장 큰 어른이자 칠성면의 살아있는 역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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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란 함석지붕 아래 청인약방 풍경은 지난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바로 옆에는 200년 넘은 마을 수호목 느티나무와 7기의 선사시대 고인돌 유적이 있다. 빛바랜 영화 속 한 장면을 연출하며 출향인들에게는 추억과 향수에 젖게 만든다. |
가을하늘이 눈부신 지난 17일 오전, 고향의 시간을 지켜온 청인약방을 찾았다.
미닫이 유리문을 살며시 열자 나무 마루 넘어 방안에서 라디오 소리가 크게 울린다.
세월의 무게가 내려앉은 마루 위 약장에는 박물관에서나 본 듯한 빛바랜 크고 작은 약상자들이 즐비하게 진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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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종철 선생은 지난 6월 25일 신씨는 약방 건물(33.72㎡)과 부지(73㎡)를 군에 기증했다. 군은 향후 이곳에 안내판을 설치하고 마을 역사 등을 설명하는 해설사도 배치할 계획이다. 괴산 대표 관광지인 산막이옛길 진입로와 약방이 불과 1㎞ 정도 떨어져 있는 만큼 두 곳을 연계한 관광상품도 만들 계획이다. |
조그마한 방안에는 어르신과 함께한 손때 묻은 물건들이 눈에 들어온다. 전쟁이 난 1950년부터 써왔다는 일기장 일부와 빛바랜 초대 통일주체국민회의 충북지역 대의원 사진이 박혀있는 액자, 박정희 전 대통령 사진틀, 지인이 선물로 주었다는 50년 된 그림, 손때 묻은 선풍기 등 근현대사의 잊혀 가는 역사가 방안 구석구석 자리를 지키고 있다.
“내가 이제 살 만큼 살아서 눈도 침침하고 귀도 어두워, 그래서 TV도 잘 안 보고 60년 된 트랜지스터라디오가 내 유일한 친구야” 날씨가 제법 쌀쌀하다며 기자가 앉은 방향으로 전기난로를 돌리며 불쬐라고 배려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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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주에 살고있는 황영란(81) 씨가 TV 방송을 보고 50년 만에 청인약방을 찾아 신종철(88) 약업사의 두 손을 덥석 잡더니 떨리는 목소리로 “제가 한겨울 학교 뒤 빨래터에서 언 손 녹여가면서 빨래하고 집에 돌아오면 목이 아파서 침도 못 삼키고 밥도 못 먹었어요. 그럴 때마다 선생님 찾아오면 목에 약을 발라주고 주신 약을 먹고 나면 금방 병이 나서 밥을 잘 먹고 그랬죠”라며 옛날을 회고하고 있다. |
“내가 이제 얼마나 살겠어, 내가 죽으면 약방의 역사도 끝나, 나만큼 약방을 잘 보존한 사람도 아마 없을 거야”라며 “어려웠던 지난 시절 약방들이 그래도 국민의 건강을 책임지고 많은 사람을 살렸어. 그런데 누구도 약방에 관심이 없어, 그래서 약방박물관 하나 만드는 게 나의 마지막 소망이야” 눈은 황반변성이 와서 흐리고 귀는 조금 어두워도 어르신의 얼굴과 정신은 맑았다.
신종철 선생은 잠시 맞은편 벽에 붙어 있는 자신의 젊은 시절 사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더니 추억의 흑백 영화필름을 돌리는 영사기처럼 지난 세월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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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25 전쟁이후 매일 써온 일기는 문화체육관광부에서 근현대역사문화자료로 활용하기 위해 대여해 갔다. 스캔등 작업이 완료되면 반환받아 이곳에 약방박물관이 개설되면 영구 전시할 예정이다.눈이 나빠진 후로는 돋보기를 보며 그날의 중요했던 내용만 간략히 기록한다. |
칠성초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해방되고 다음 해 괴산중학교 시험을 봤는데 전체에서 2등으로 합격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 할머니가 이웃에 사는 친척에게 등록금이 5000원을 빌려왔는데 갑자기 할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어렵게 빌린 돈으로 우선 장례를 치르고 나니 중학교는 그만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공부가 하고 싶었던 그는 무작정 상경을 한다. 서울 용산에 고향 어른이 운영하는 치과를 찾아가 병원에 온갖 궂은일을 도맡아 했다. 청소부터 기공사, 간호보조원까지 하면서 야간 중학교에 다녔다. 중학교 4학년 때 6. 25전쟁이 나는 바람에 사흘을 걸어서 고향에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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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종철 선생은 자의 반 타의 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세 번이나 했고 칠성면 재건 국민운동촉진회 회장도 맡았었다. |
전쟁이 끝나고 고향에서 별일 없이 지내던 중 서울에서 치과 하던 고향 분이 청주에 내려와 치과병원을 했는데 거기서 한 2년 열심히 일했다. 그때 모은 돈으로 의대를 가려고 했는데 의사 부인이 들었던 계가 깨지면서 내 월급까지 모두 날아가고 대학의 꿈도 날아갔다.
그후 인천의 한 치과병원에서 근무하던 중에 부모를 모시던 동생이 군대에 입대하는 바람에 어른을 모시기 위해 다시 낙향한다.
그때 청주 치과에서 일하던 시절, 알고 지내던 양약종상(양약 도매상)의 도움으로 약점 허가를 받아 개업을 한다. 1958년 3월의 일이다. 약방을 얻을 돈도 없었는데 마을주민의 도움으로 양반집 별당채를 구해 약방을 시작했다. 나에게 은혜를 베푼 두 어른을 기억하기 위해 상호를 ‘청인(淸仁)약점’으로 지었다. 나에게 도움을 준 청주 약종상과 인천병원 원장 부부를 기억하기 위해 한 글자씩 딴 것이다. 청인약점에서 시대에 따라 청인 약포로 바꿨다가 지금의 청인약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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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종철 선생이 보존하고 있는 옛 약품과 주사용 앰플들을 꺼내 보이며 마을의 건강지킴이로 살아온 세월을 이야기 하고 있다. |
약방 개업 초기 우리 면 인구가 만 명 정도였지만 의료시설이라고는 약방만 2~3개가 있었다. 대부분 마을 사람들이 병원에서 근무한 경험이 있는 우리 약방을 주로 찾아주었다.
우리 마을은 예전부터 술집이나 다방이 없었다. 고인돌 앞 커다란 느티나무가 마을 사람들 쉼터 역할도 했고 청인약방은 주민 모두의 사랑방이었다. 늘 약방 주변에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약속도 약방으로 정하고, 아이나 어른이나 약방마루에 앉아보지 않은 사람이 없다. 그래서 지금도 다른 건 다 없어져도 우리 약방은 끝까지 남아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신종철 선생은 자신의 가장큰 단점은 마음이 여린 것이라 한다. 누가 부탁하면 거절을 못 한다. 마을에서 신망도 높고 지도력도 있으니 마을 발전을 위해서라도 정당 활동에 참여해야 한다고 해서 자의 반 타의 반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을 세 번이나 했고 칠성면 재건 국민운동촉진회 회장도 맡았었다.
주례 서고, 마을 대소사는 다 맡아서 했다. 마을 사람들의 어려운 부탁을 하면 앞에서 거절을 못 하고. 뻔히 저 사람한테는 돈을 못 돌려받을 것 같아도 형편껏 빌려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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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종철씨가 약방앞에서 지나온 세월의 이야기를 구술하고 있다. 이규서(58) 칠성면장은 “저도 이 마을에서 나고 자라서 신종철 선생님을 잘 안다. 신 선생님은 한마디로 사회사업가다. 어려운 이웃을 위해 늘 발 벗고 나섰다.”라면서 “예전에 우리 면에서 누가 결혼한다고 하면 80%는 신 선생님이 주례를 섰을 정도로 마을을 위해 정말 애 많이 쓰셨다”라고 말했다. |
글을 잘 모르는 사람들이 찾아와 부고장을 써달라고 부탁하면 밤새워 100장 이상씩 써주기도 하고 아이들이 태어나면 즐거운 마음으로 이름도 지어주고, 생각해보니 주례도 천 오백 번 이상 섰다. 몸으로 때울 수 있는 건 다 그렇게 했다. 뿐만아니라 마을 사람들이 돈 얻어달라고 부탁하면 여기저기 다니며 돈 얻어주고 빚보증 서주었다. 개인 사채는 정말 무섭다. 6억 정도 빚보증 서 준 게 금방 10억이 넘었다. 어쩔 수 없이 청주 가서 은행에 우리 집 담보로 우선 급한 불 끄고 거의 50년 가까이 보증 빚 갚느라 힘들었다. 덕분에 아이들도 학교 다니고 한창 클 때 제대로 뒷바라지 못했고 지금도 그것이 자식들에게 미안한 일이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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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 마을에서 평생을 함께해온 팽용만(86) 어르신은 “내 국민학교 선배인데 평생 정직하게 딴짓 안 하고 잘 살아온 형님이야, 맨 날 신세 진 기억 밖에 안나, 마을에서 제일 고마운 사람이지”라며 “건강하게 오래 살아서 마을을 끝까지 잘 지켜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
신종철 선생은 이제 빚도 모두 갚았고 약방도 나라에 맡겼다. 그래도 조상이 물려준 조그만 땅덩어리와 사는 집 한 채는 지켜냈다. 70세에는 자신의 몸까지 충북대 의대에 해부 실습용으로 기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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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종철씨가 약방앞에서 부인 심정옥 여사와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큰아들 신동한(59) 씨는 “언제나 바깥 일로 분주하셨지만, 자식들한테는 끔찍하셨다. 말씀과 행동이 일치하는 분”이라며 “아버님 못지않게 고운 성품의 어머니 역시 훌륭한 분이다. 두 분 모두 진심으로 존경한다.”라고 밝혔다. |
잘 찾아보면 더러 약방이 있겠지만 여기처럼 옛 약방 모습과 자료가 많이 남아있는 곳은 없을 것이다. 청인약방이 소문이 나면서 갈수록 찾는 사람이 늘고 있는데 이참에 근현대 역사 문화 보존 등을 위한 약방박물관으로 거듭났으면 하는 것이 신봉철 씨의 마지막 소망이다. 그 일을 위해 약방 전체를 괴산군에 기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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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을의 중앙에 자리한 청인약방은 도정리 마을 주민의 사랑방이었다. 신종철 선생은 평생을 나누고 베풀며 이웃과 그렇게 살았다. 자식들에게도 넉넉한 삶은 제공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존경받는 아버지로 살았다. 키는 작지만, 모두가 그를 우러러본다. 마을의 큰 어른이다. 어려운 이웃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 약으로든 물질로든 그들의 숨구멍을 틔워주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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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란 함석지붕 아래 청인약방 풍경은 지난 시간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바로 옆에는 200년 넘은 마을 수호목 느티나무와 7기의 선사시대 고인돌 유적이 있다. 빛바랜 영화 속 한 장면을 연출하며 출향인들에게는 추억과 향수에 젖게 만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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